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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 너의 안녕부터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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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 친정 / 권순학 친정은 종교다 신앙이다 구세주 사는 천국이다 그 모습 그 목소리라면 언제 어디서든 이끌리는 저항 제로 초전도 성지 나는 그곳에서 왔다 그곳에는 시로 쓴 경전이 있고 나는 그것을 뼛속까지 믿는다 엄마로 시작해 엄마로 끝나는 나의 과거이자 미래인 그 경전 나도 쓰기 시작했다 밤새 안녕을 묻는 친정 나들이 그것은 성지 순례다 한때 엄마, 엄마 부르면 가슴부터 쓸어내리던 나의 구세주 지금은 식구 하나하나 지워가며 없는 아들만 찾는다 아기로 돌아간 나의 구세주 오늘도 나는 그곳으로 간다 2024. 1. 10.
섬 / 권순학 안개 자욱한 바다지만 섬과 섬 사이엔 길이 있다 북서풍에 휜 섬의 옆구리 웅크린 지붕 위에 세모를 그리고 네모와 동그라미로 장식한다 맨발로 꽃길만 걸으려다 문득, 사과를 깎는다 사과면 다 같은 줄 알았는데 갈면 더 그런 줄 알았는데 흠 있고 못난 것이 더 큰 소리로 더 많은 즙 흘리는 것이 훨씬 더 맛있다는 것 먼저 입 댄 파도 아닌 밤새 외눈으로 말하는 섬 2023. 12. 20.
고시원 고시원 / 권순학 정오가 떠난 후 해일이 인다, 달달한 하품을 물고 노곤한 몸을 끌고 거기는 미로, 출구 가물가물하고 담쟁이 몸부림칠 때 동행하는 들풀과 저 멀리 꽃 하나 더 있는 벽과 벽 사이 반집 승부 중인 반상 그곳 백의 생략이 오늘을 점멸시키고 있다 패를 쓴 슬리퍼와 츄리닝 바지 거울에 갇힌 검정 구두의 사활을 주시하는 여기에도 바람이 일 수 있다 볕이 들 수 있다 한 줄기 빛에 걸린 회오리친 지난 삶의 허물들과 꼼지락거리는 내일을 지키는 책상 한구석 가족사진 역전 끝내기, 이번엔 그들 차례다 계간 『시마詩魔』 제17호, 2023년 가을호 2023. 11. 10.
인형처럼 웃거나 울지 않아도 인형처럼 웃거나 울지 않아도 / 권순학 크레이프 케이크처럼 쌓여 있는 것이 집인데 돌아갈 수 없는 집 우리는 분명 길을 잃고 있어요 사이렌에 실려 가는 집 어둠 속 종횡무진 달리는 타이어 차선은 비명조차 잃고 펄럭이는 깃발처럼 중앙선 넘나드는 생각들 강물이 눈높이를 조금씩 낮출 때마다 아등바등 대며 끌려 나오는 생각 사이렌은 집에 돌아간 지 오래지만 1인 병실에 누워 방울방울 떨어지는 목숨 돌아갈 수 있어야 집이고 돌아가야 집인데 메마른 입만 낙엽처럼 쌓이는 집 아무리 자세히 보아도 그믐달은 절대 웃지 않지요 버스 정류장에 앉아 밤새 기다려도 떠난 막차는 마지막 정류장을 기억하지 않는 것처럼 노선에 매달린 수많은 정류장을 불러도 대답 없는 것처럼 현재는 지나가는 미래 반쯤 피거나 활짝 핀 꽃 꺾어 흩어진.. 2023. 7. 20.
혼자이기에 혼자이기에 / 권순학 책장을 넘기며 외발 바퀴를 타고 신호등 너머로 질주했을 누군가의 흔적을 넘긴다 문장과 문장 넘겨 콘센트에 박힌 피로를 뽑으며 넘기지 못한 오늘을 닫는다 흑백의 순간들 어제는 어제를 잊고 오늘은 오늘 잊는 사람들 저녁이면 고단한 하루를 불러 머리 등 팔 다리 부위별로 노동의 무게를 잰다 석양 때문인가 어둠 때문일까 노동이 보이지 않는다 저울 눈금이 얇다 흩날리는 거리, 검붉은 날갯짓 사이로 텅 빈 저녁이 흘러가고 있다 빛의 흔적에서 돋은 가시 모아 흔들어 불을 피우고 두리번거리는 사람들 문자를 표정으로 상황을 사진으로 변환시키고 있다 혼자이기에 푸른 아침을 하얗게 오려낼 각오로 텅 빈 저녁을 끓이는 어둠 뭉치들 어제는 어제를 잊고 오늘은 오늘 잊고 있다 시집 중에서 2023. 7. 4.
말 / 권순학 가령 입을 벙커라 하면 말이란 것은 벙커를 탈출하는 총알이랄까 그것도 혓바닥이란 활주로를 툭, 툭 이륙하여 비문碑文 사이를 빠져나와 누군가에게 닿아야 소멸되는 것이라 할까 쏘아대는 뼈와 막는 살 둘 사이의 균형이 무너질 때 아픔이 시작된다, 걷잡을 수 없는 가끔씩 찾아오는 군더더기 없는 평온함 그 근원은 빨강 노랑 파랑 아닌 하얀 침묵에 있다 연속적인 말은 검은 실수를 품고 달린다 숨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말들 말과 말 사이의 간극은 얼마나 될까 대체로 그와 나 사이 정도일까 크게 다름은 전쟁의 서막이다 말의 생명력은 호흡에 근거한다 한참 혼자 말을 하다 보면 초원을 거침없이 달리는 말 그를 달리게 하는 채찍이 떠오른다 벙커 속 어디에 채찍이 있을까 급격히 끓어오르기도 하지만 더 급히 식을.. 2023. 7.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