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 너의 안녕부터 묻는다

전체 글58

붉은 계절 붉은 계절 / 권순학 무언가 잘 모를 때면 본능처럼 먼 것을 불러오곤 한다 신앙처럼 검은 것을 찾아다닌다 다른 행성에서 왔나 아프리카에서 온 걸까 거실에 저 먼 인도인 양 붉은 비가 내린다 함박눈 자리에 검은 부스러기가 내린다 이 계절은 블록 장난감처럼 견고하지만 어느 해보다 더 물렁거리고 단내가 난다 아내는 이 계절을 닮았다 서풍이 몰고 온 뿌연 순간들 무사히 건넌 징검다리 돌 개수를 헤아려본다 붉은 벨소리 닿은 세포마다 하얗게 변하고 있다 먼지 가득한 싱글 침대엔 걱정 말라는 노래가 입에서 입으로 울려 퍼지고 시동 꺼진 자동차 의자마다 노란 라면이 끓어오른다 무지개는 책꽂이에 피어 있지만 말은 말을 몰다 붉은 잠을 부른다 무언가 잘 모를 때면 먼 것을 불러오곤 하는 것처럼 검은 것을 찾아 붙이는 것처.. 2023. 7. 4.
슬픔 슬픔 / 권순학 슬픔은 네가 떠날 때 그려둔 무채색 모 난 풍경 검정 속 빨강이 묻어둔 투명 눈물의 씨앗 때로는 바람에 일렁이는 허공 향기 없는 꽃 작지만 큰 그릇 울컥울컥 쏟아지는 영혼 가을장마를 베고 모로 누워 밤을 지샌다 부슬부슬 부서지는 가을 귀뚜라미가 전하는 전율 쓰라린 속 달래는 슬픈 비닐봉지들 그럼에도 거기 너 여기 나 사이 구름은 적막은 걷히지 않고 눈을 감게 하는 시집 중에서 2023. 7. 4.
환승역 환승역 / 권순학 악마의 소리가 들린다 너를 위한 것은 이것뿐이라며 달려오는 창밖엔 별들이 하나둘 흩날리고 거리엔 뭉쳐진 햇빛이 하얗게 쌓였다 발자국은 점점 더 진해지지만 기다리는 열차는 아직 멀었다 피곤한 설명은 생략하며 빨라지는 발걸음 북적대는 36.5도 대합실 벽엔 붉으락푸르락 대는 전광판이 시야를 열고 스피커 목소리는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있다 부산으로 목포로 10량씩 수서로 20량 무궁화로 6량 시간 맞춰 보내고 익숙한 듯 아무렇지 않은 듯 지우고 쓰지만 고향 내려갔다 다시 올라올 때처럼 그 속, 거리 두기 의자 주변으로 서로 기댄 사투리들이 서성거리며 흘낏, 흘낏 올려다보는 전광판 갑자기 에스컬레이터 계단 접어가며 내러가는 한 무리 몇 명일까, 퍼즐은 모서리부터 맞추는 것인데 점점 더 깊어지는.. 2023. 7. 4.
기도라는 것 기도라는 것 / 권순학 울다가 웃는 것이 기도고 웃다가 우는 것도 기도다 감각 없는 시간 울림 없는 공간일지라도 하늘이든 땅이든 뭐든 울려야 기도다 울릴 수 없다면 너라도 울어라 무엇이든 울릴 수 있어야 기도고 함께 우는 누군가 있어야 기도다 어떤 이는 어제를 지우려 기도하고 또 어떤 이는 다시 올 어제를 위해 기도한다 닿지 않는 기도는 불평등한 음모 오지 않는 은총은 잘못된 주소 누군가는 들을 이를 위해 기도하고 누군가는 기도를 위해 기도한다 누구나 하는 것이 기도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기도다 닿을 듯 말 듯 하는 것이 기도다 이루어지지 않는 기도라도 이루어질 수 없는 기도라도 해야 기도다 삶이 기도고 기도가 삶이다 시집 중에서 2023. 7. 4.
그리운 술 그리운 술 / 권순학 술이 그리울 때 있다 외롭거나 힘들지 않아도 그럴 때 있다 김치 한 조각 없어도 골방 찾지 않아도 술이 밥보다 단 때가 있다 오른손이 채우고 왼손이 비워도 술이 누구보다 따뜻한 때 있다 그런 날이면 누가 말려도 다른 무엇 제치고 술에게로 간다 씁쓸한 만남일 수 있지만 때로는 터질 것 같은 술이지만 알면서도 찾아간다 잊은 지 이미 오래인 청춘이지만 꺼져버린 중년이지만 누가 부르지 않아도 산소 같은 시원한 바람 타고 한라산 오른 처음처럼 하얀 잎새 위에 이슬 맞으러 술에게로 달려간다 시집 중에서 2023. 7. 4.
스테이플러 스테이플러 / 권순학 악어의 입을 가진 본명보다 더 굳은 별명 가진 수없이 이 악물지만 늘 빈손이다 철의 여인답게 또박또박 뱉는 말마다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고 오히려 귀 맞대게 하는 철심 박혀 있다 접힌 허리지만 정갈한 마음 가졌다 겸손한 노동으로 팔짱 낀 장정 두 팔 벌린 아낙 품에 조무래기들 줄줄이 딸린 한 가족이 탄생한다 바람 불고 계절 바뀌어도 도망치지 않는다 시집 중에서 2023. 7.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