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 너의 안녕부터 묻는다

by 오늘@내일 2023. 7. 4.

말 / 권순학

 

 

가령 입을 벙커라 하면

말이란 것은

벙커를 탈출하는 총알이랄까

그것도 혓바닥이란 활주로를 툭, 툭 이륙하여

비문碑文 사이를 빠져나와

누군가에게 닿아야 소멸되는 것이라 할까

 

쏘아대는 뼈와 막는 살

둘 사이의 균형이 무너질 때

아픔이 시작된다,

걷잡을 수 없는

 

가끔씩 찾아오는 군더더기 없는 평온함

그 근원은 빨강 노랑 파랑 아닌

하얀 침묵에 있다

 

연속적인 말은 검은 실수를 품고 달린다

 

숨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말들

말과 말 사이의 간극은 얼마나 될까

대체로 그와 나 사이 정도일까

크게 다름은 전쟁의 서막이다

 

말의 생명력은 호흡에 근거한다

한참 혼자 말을 하다 보면

초원을 거침없이 달리는 말

그를 달리게 하는 채찍이 떠오른다

 

벙커 속 어디에 채찍이 있을까

 

급격히 끓어오르기도 하지만 더 급히 식을 줄 아는 말

말의 체온을 말하자면

대체로 섭씨 36.5도 부근이리라 생각하지만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다

 

저쪽에서 한 말이 여기까지 달려오는 동안

햄버거 하나를 다 먹었다

 

그의 말을 다 먹고

이어 블랙커피까지 마셨다

식어버린 그의 체온으로

 

벙커에서는 갇힌 말들이 웅얼대며 굴러다니고 있다

그 말들의 쓰임에 대하여는

아직 생각해 본 적 없다

 

유효 기간 없는 말의 씨앗들이 계속 복제되고 있다

 

긴장된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시집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중에서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형처럼 웃거나 울지 않아도  (0) 2023.07.20
혼자이기에  (0) 2023.07.04
붉은 계절  (0) 2023.07.04
슬픔  (0) 2023.07.04
환승역  (0) 2023.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