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 권순학
가령 입을 벙커라 하면
말이란 것은
벙커를 탈출하는 총알이랄까
그것도 혓바닥이란 활주로를 툭, 툭 이륙하여
비문碑文 사이를 빠져나와
누군가에게 닿아야 소멸되는 것이라 할까
쏘아대는 뼈와 막는 살
둘 사이의 균형이 무너질 때
아픔이 시작된다,
걷잡을 수 없는
가끔씩 찾아오는 군더더기 없는 평온함
그 근원은 빨강 노랑 파랑 아닌
하얀 침묵에 있다
연속적인 말은 검은 실수를 품고 달린다
숨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말들
말과 말 사이의 간극은 얼마나 될까
대체로 그와 나 사이 정도일까
크게 다름은 전쟁의 서막이다
말의 생명력은 호흡에 근거한다
한참 혼자 말을 하다 보면
초원을 거침없이 달리는 말
그를 달리게 하는 채찍이 떠오른다
벙커 속 어디에 채찍이 있을까
급격히 끓어오르기도 하지만 더 급히 식을 줄 아는 말
말의 체온을 말하자면
대체로 섭씨 36.5도 부근이리라 생각하지만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다
저쪽에서 한 말이 여기까지 달려오는 동안
햄버거 하나를 다 먹었다
그의 말을 다 먹고
이어 블랙커피까지 마셨다
식어버린 그의 체온으로
벙커에서는 갇힌 말들이 웅얼대며 굴러다니고 있다
그 말들의 쓰임에 대하여는
아직 생각해 본 적 없다
유효 기간 없는 말의 씨앗들이 계속 복제되고 있다
긴장된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시집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