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 너의 안녕부터 묻는다

전체 글58

이 땅 어딘가에 이 땅 어딘가에 / 권순학 가보지는 못했지만 이 땅 어딘가에 노을마다 떨어지는 새의 깃털 같고 마지막 날갯짓 같은 파도 있을 것 같다 해도 왜구도 삼킨 그곳이지만 피지 못한 꽃 꺾은 모가지 어쩌지 못해 울고 있을 물길 있을 것 같다 보지는 못했지만 절단된 시간 표류하는 거기 어디쯤 침몰하는 그 아침 ‘사랑ㅎ’ 미완성 문자도 끊이지 않는 절규도 있을 것 같고 그 모든 것 외면한 걷히지 않는 안개 속 그 무엇도 숨어 있을 것만 같다 꾸역꾸역 돌아오는 봄이지만 아직 돌아오지 않는 그 꽃 달아보지 못했지만 믿음이 기다림을 버티게 하는 그 포구 어귀 노란 리본 있는 한 어떤 의심보다 먼저 그 바다 통째 건질 누군가 꼭 있을 것만 같다 이 땅 어딘가에 시집 중에서 2023. 4. 10.
그들의 집 그들의 집 / 권순학 저 먼 섬 속 섬, 한라산 중턱 까마귀 울어대는 그곳 빼곡한 집집마다 묵은 어둠 자욱하다 바람 타던 깃발들 분화구 비워두고 다들 어디 갔을까 행 방 불 명, 평화공원 문패 둘 덩그러니 달아둔 그곳에 까마귀는 왜 제 눈알 파낸 부리 심어두었을까 해묵은 시집 뜯긴 뒷장 같은 그곳에서 어린 신발 그리고 검정 냄새가 난다 어디에도 없는 붉음 퍼 나르는 어느 그믐밤 바늘구멍 찾는 이 있었을 거고 분화구 태우는 이 있었을 거다 몽롱한 부엌 나태한 안방 해체한 자리 창문 몇 걸고 부지깽이 든 모자 하나 모셔와 허공을 휘젓고 장식하는 자 있었을 거다 백내장 낀 해와 달처럼 붉음이 투명 뱉을 줄 모르고 검정이 검음을 삼킬 줄 모르는 그 후 녹슨 문패 너머 가려운 마당 피지 못한 그들 다시 돋고 피려.. 2023. 4. 3.
황사 경보 황사 경보 / 권순학 성형수술이 날개를 달았다 누런 하늘도 했고 노란 봄도 했을 것이다 똑똑 부러지던 시계는 경련을 일으키며 아날로그로 성전환 했다 디지털 발은 새벽에야 귀가해 아날로그 아침을 드러눕혔다 누런 해를 베어 문 나무, 노란 위액을 토하며 선홍의 핏방울을 떨어뜨린다 진폐증 환자 굴뚝이 증기기관차가 된다 북미 들소가 호두과자 기계처럼 부도수표 찍으면 한반도 외양간은 파리가 점령한다 나비가 전파를 타고 날아다닌다 동서 퓨전요리 즐겨 먹는 텔레비전을 전파가 점거하여 농성하고 있다 목소리가 없다 모래가 파도 삼키듯 귀는 목소리를 삼킨다 하늘도 눈을 뜨지 못한다 흔들면 흔들수록 엉겨 붙는 밤은 신용을 잃었다 남녀 구별 없는 화장실이 만원이다 휴대전화 액정 닦듯 손가락으로 눈알 문지른다 하루가 살얼음처럼.. 2023. 3. 29.
물의 힘 물의 힘 / 권순학 물은 말이다 누구한테라도 배우기는 열심이지만 억지로 가르치려 들지 않는 거라 게다가 남 밀어주는 일은 선수인데 제 앞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맹추인 거라 인적 없는 산골짝 이슬조차 거북등 찾아 나서는 거 보라 바람도 숲도 새도 이구동성으로 꽉 잡지 않으면 밀린다 해도 오히려 티를 씻고 들보 뽑아 나르는 거라 폭포나 늪 마다하지 않고 혼자 웃고 울며 거북에게 가면서도 그 누구에게 강요하지 않는 거라 속으로 하소연과 기도는 해도 절대 탓은 않는 거라 그러며 하늘까지 가는 거라 그게 물인 거라 시집 중에서 2023. 3. 27.
이면지 이면지 / 권순학 가진 것 많아도 쓸 데 없는 이쪽과 가진 것 없어도 쓸 데 많은 저쪽 밤의 책장을 넘기듯 꼬기작꼬기작 접힌 이면지를 펼치면 비록 팽팽하진 않지만 빛과 그림자가 나타나죠 그때 이쪽과 저쪽을 엄지와 검지로 아주 살살 비벼 보아요 어둔 골목길 담벼락에 머리 기대고 기도하는 사람이 보일 거예요 종이 뒤에 선 사람의 숨결이 만들어내는 무소유의 세상 그 세상이 얼마나 따듯한지 금방 알게 될 거예요 시집 중에서 2023. 3. 25.
찔레, 그 꽃 찔레, 그 꽃 / 권순학 오월 손끝에 쓸쓸함이 걸려 있다 보낸 사람의 흩어진 향기 떨어진 거미의 하얀 비명 같은 붉은 눈물이 맺혀 있다, 떠난 사월의 허물처럼 늦는 유월의 변명처럼 너머 누군가의 망설임 바람의 녹슨 푸념 같은 그것 좀처럼 나지 않는 합의 향한 질책과 가시와 가시 엉킨 철책 사이 기대 웃는 뒷모습 한결 같은 오월 손끝에 찔레, 그 꽃 피어 있다 시집 중에서 2023. 3. 22.